전시 리뷰


허은실 시인

oss0816, 그림자들 헤아리다 지문이 거멓다 
2019/9/29 - 2019/10/20. KT&G Sangsang Madang Gallery Seoul, South Korea 

   흔(痕)의 세계, 마주침에서 마주함으로


풀들은 뒤엉키고 넝쿨을 뻗어간다. 얼크러진 수풀 속 벌레들의 바글거림과 잉잉거림을 듣는다. 초본 줄기들의 얽힘과 엉킴. 목본 가지들의 뻗어나감. 미친 듯한 생성과 번성. 그것은 맹세처럼 열렬하다. 그것은 우거져 무정형의 형상이 된다. 덤불은 깊고 깊어져 수풀을 이룬다. 숲이 된다.

숲은 구멍을 품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너머. 당신의 인식 바깥. 낯선 차원. 그 어두운 곳에서 서늘한 푸른 숨이 불어나온다. 그 입김은 두려운 매혹이다. 숲은 속삭인다. 수풀은 수런거린다. 그 너머에는 죽은 짐승이 쓰러져 있고, 갈대숲 속에는 깃털이 흩어져 있기도 하다. 그 숲은 우리의 현실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문명의 정돈된 질서 속에도 데자뷔처럼 현현하거나 찰나의 기미처럼 찾아드는 것. 기실 우리의 내면에 기거하는 것. 그것과의 어떤 마주침

그러나 자연은 자비롭지 않으며,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芻狗: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하였다. 다만 무성함의 무상함이여. 아니 무상함만이 무성하다. 우리는 겨우 여러해살이일 뿐이다. 죽어가는 짐승의 비명이 대기에 스며든다. 부글거리는 피와 썩어가는 살이 흙으로 스며든다. 나무들은 비명을 먹고 자란다. 가지는 굵고 가시는 단단해진다. 그 가지를 휘감으며 넝쿨식물이 자란다. 시간은 그의 지문을 나이테로 새긴다.

그것을 그는 본다. 무엇을 말인가.
                                                  날아가버린 새인가. 새의 넋인가.
                                                  살라져버린 재인가. 재의 혼인가.
그는 그것을 본다. 그것을 바라본다.
                                                  새의 사라짐을. 재의 사그라짐을.

사라진 새의 자리.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계절은 흐르고 만남은 지연된다. 겨우 흔적만을 추적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가령, 바람의 흔적으로서의 물결. 그러나 이 물결은 이미 그 물결이 아닌 것. 새의 흔적으로서의 가지의 흔들림과 대기의 떨림. 가령, 불탄 자리를 서성이며 흔적을 더듬는 일. 흰 연기, 검은 그을음. 흰 재, 검은 숯. 지금 불타고 있는 것조차 실은 생성중인 죽음이다.

                                                   다만 자욱한, 자국들. 그을린 그림자들.

그것을 만지는 손의 지문이 검어진다. 아니 예술가의 일이란 지문이 검도록 그것을 더듬는 것이 아닌가. 그 흔적을 마주하여 오래 바라보는 자는 결국 내면의 풍경에 도달할 것이다. 흔적을 응시하는 일은 결국 마주함이다. 나를 마주함.

무릎을 꿇는 자는 묻는 자이다. 그것은 사라진 것에 대한 질문이며 애도이다. 그것은 흔적과 기미를, 그림자를 헤아리는 일이다. 가을나무는 세례자의 손처럼 그의 머리에 잎을 떨어뜨린다. 그 위로 곧 식어갈, 오후의 빛이 드리운다.

익숙한 친밀감과 낯선 이질감이 공존하는 고성의 사진들은 내게 이런, 일종의 포이에시스(poiesis)로 다가왔다. 특히 한 작품(「oss0816」) 앞에서 붙들리듯 오래 서 있었음을 따로 적어두고 싶다. 일제히 일어나 걸어나올 것 같은 초록 생명체의 그 기이한 꿈틀거림과, 동시에 억눌린 감정과도 같은 낮은 채도의 녹색. 곧 저녁이 닥쳐올 것만 같은 특유의 그 어둡고 무거운 색감은, 오래 그것을 마주해온 자가 감득한 사유의 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주침이 다시 내 안의 무엇을 일깨웠고 그것을 마주하느라 나는 조금 골똘해졌던 것이다. 그가 새로이 마주친 것, 그리하여 마침내 마주하려는 또다른 세계가 궁금하여 아마도 나는 그 흔적을 뒤쫓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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